'구성된' 세계에서 살아가기
명품 로고나 기업 브랜드, LOVE와 같은 기호가 병합된 작품은 친숙한 형상을 구축하면서 작품을 감상하는 누구에게나 쉽게 다가간다. 초기에는 이 기호나 로고에 알레고리를 혼합하며 의미 가치가 지니는 바를 교란하기 위한 전략도 포함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점차 이 전략을 소거하며 지금의 방식으로 정비되었다. 김병진 작가의 작품은 수작업의 흔적을 철저하게 지우는데 마치 공장 생산품처럼 마감 자국마저 철저히 지우고 있다. 그의 작품 세계는 점점 번다함을 지워 가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선택과 집중, 판단과 실행이 선명한 이라고 앞서 밝혔던 이유가 그의 이런 작업의 방식과도 결을 함께한다.
그가 이 행보를 취한 이유는 무엇일까. 생활 세계에서의 변화는 그도 짚은 부분이다. 설명에서 단편적으로는 작품을 통한 상호 교류의 지점을 밝히기도 했다. 돌이켜 보니 생각보다 많은 단서를 전해 주었는데 그 방식이 작품을 방대한 언어로 다시 풀어내어 설명하는 데 공들이기도 하는 작가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말을 아끼고 주로 사실에 집중했다. 작품은 조형에서 점점 더 대단히 명징한 세계를 구축해 가는데 이 명징함이 과연 가능한가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과한 명징함은 오히려 불가능한 세계에 대한 역설일까. 문득 최근 미술 장터라는 국가 주도 사업에서 가장 각광을 받고 팔렸던 작업들이 명품 로고가 곁들여진 작품들이었다는 얘기가 떠오른다. 백화점이나 유동 인구가 많은 지역 공간에서 벌어졌던 미술 장터는 적극적 소비의 욕구가 있는 이들이 지나다니는 문턱에서 소비의 터널 혹은 소비의 발구름판과 같은 역할도 수행했다.
많은 이들은 상품 소비가 아니라 기호가 소비된다는 20세기의 일갈에 수긍한다. 현재 미술이 유통되는 구조 또한 시장과 미술 제도의 변방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공격적으로 소비의 습속을 읽고 그 욕망을 분석해야 하며 그 시장으로의 편승을 더 이상 저잣거리의 일들로만 한정시킬 수 없다. 예술이 성스러움에 복무하던 시대도 아니지만 그렇기 때문에 속세를 향해 전면 이행했다고 말하는 것도 오류다. 시대 이행은 가치 매김의 무게추가 이동했을 뿐 과거의 가치는 동시대에서도 혼재되어 누군가의 마음을 홀리고 있다. 이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치를 떨 게 아니라 구성된 세계를 보고, 구성된 세계의 찢겨져 있음을 목도하고, 세계에 대한 무수한 단언과 매끄러움이 가당치 않음을 분별해 내야 한다. 이 명민함에서 비롯한 (하나의) 전략이 김병진 작가의 작품이라면 어떨까. 굳이 더 세계의 혼란스러움을 작품의 혼란스러움으로 재현할 필요가 없다. 말끔하게 내어놓은 그의 작품에서 누군가는 자신을 홀린 기호의 매력을 읽을 수 있으며, 여전히 아끼는 대상물의 자취를 보기도 하고 희미해져 가는 삶의 가치를 되살릴 수도 있다. 혹은 소비되는 기호의 얼개에 반감을 가질 수도 있고 조형의 세계에까지 전염된 상품 생산의 자취에 못마땅할지도 모른다. 그 어떤 감상도 가능한데 다만 하나의 입장만을 내세우는 인상 비평도 구성된 세계에서 구성된 인간이 취하는, 이것 또한 하나의 구성물임은 받아들여야 하며 이제 이 받아들임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 게 우리의 몫이다.
글_김현주(독립기획, 미술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