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OW PIGMENT


패스트 라이프가 성공하는 사람의 미덕이라 생각되던 시대에, 미술은 성공한 인생의 사치스러운 전유물로서 슬로우 밸류의 대명사 였다. 삶의 여유가 보편화되면서 슬로우 푸드, 슬로우 시티, 슬로우 에이징 등 현대인의 생활에 슬로우 라이프가 강조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불과 십여년 전부터 패스트푸드가 건강에 좋지 않다는 것이 알려지기 시작한 이후, 빠름을 지향하던 우리의 삶은 변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현대미술은 패스트 라이프가 정크스타일로 취급되는 시대의 흐름조차 적응하였다. 미술작품이 단지 소비를 위한 생산을 목적으로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패스트한 팝아트의 방식이 거대자본의 흐름에 동조하면서 아트는 팝에 시녀를 자처하였다. 시대의 흐름은 거스를 순 없지만, 근자의 아트테이너류의 사건들에서 보이듯 어떻게든 파퓰러한 모티브만 취한다면 예술가치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라는 가벼운 생각들은, 미술에 대한 가치판단이 패스트문화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을 여실히 반증한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화가 장희진 작업의 새로운 주제어인 'Slow Pigment'는, 작가의 천천히 가는 공력과 천부적인 칼라감각을 대변하는 용어로 쓰여 졌다. 슬로우 피그먼트는 창작의 개념부터 표현의 방식까지 말 그대로 느린 방법을 지향하고 있다. 작가는 '천천히 그리고 온전하게(Slowly and Soundly)'를 작품 활동의 슬로건으로 삼아왔다고 말한다.

 

장희진표 창작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작가의 천부적인 색채감각과, 공예를 하듯 천천히 만들어내는 회화베이스의 특이점이다. 모델링페이스트를 수없이 쌓아올리고 매만지는 시간과, 노동의 공력이 작가작업의 베이스에 요철로 드러난다. 조수에게 맡기거나 공방에 일거리로 위탁하는 그런 작업이 아닌, 순전히 작가의 손과 의도와 시간으로 만들어지는, 말 그대로 느림의 결과물이다. 이러한 느린 창작에는 작가의 고집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십 수 년 전부터 해 왔던 작가의 베이스 만들기에는 자신만의 색조를 입히기 위해 바탕을 갈고 닦는 장인의 뉘앙스마저 느껴진다.

 

장희진 작가는 2001년부터 특유의 화면 베이스 만들기와 반전페인팅의 회화방식을 구사해 왔다. 2002년의 'In Between_사이공간'이라는 타이틀로 시작한 작가의 작업은, 십수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직선요철의 베이스 면이 굴곡진 유려한 라인으로 변모하면서, 'Sound of Wave' 와 'Wind of Tree'등의 시리즈로 이어졌다. "나의 그리기는 나무의 잔가지 사이사이로 비추는 빛의 면적, 즉 사이공간을 그리는 것이다."라는 작가의 말과 같이, 화면위에 단순히 이미지를 그려넣는 전형적인 회화방법이 아닌, 역으로 허공의 부분에 채색을 가하여 이미지를 드러내는 역 페인팅의 방식은 장희진의 유니크한 작화방식으로 화단에 자리매김 되어있다. 그간 상품디자인이나 광고, 심지어는 타 작가들조차도 작가의 고유한 회화스타일을 모방하는 사례가 심심찮게 발견되었으나, 이러한 창작방식의 오리지널리티가 장희진에게 있음은 올해 초 클레이아크미술관에서 열린 전시도록에서 발췌한 작가와의 인터뷰를 통해 알 수 있다.

 

"작업과정에 대해 말하자면 먼저, 회화의 베이스를 만들기 위해 캔버스에 특수 제작한 물결모양의 대형 곡선자를 이용하여 9mm간격의 라인을 치고, 라인을 따라 0.4mm의 라인 테잎을 붙인 뒤 그 위에 나이프를 사용하여 모델링페이스트를 수 십 차례 펴 발라 올리기를 반복합니다. 매체의 표면이 적당히 마르면 그 위에 다시 얇게 펴 바르기를 반복하는 지난한 노동의 과정을 48시간 정도 지속합니다. 이 과정을 거쳐 캔버스의 모델링표면층이 0.5mm정도의 두께가 되었을 때 하루를 건조시킨 후, 라인테잎을 조심스럽게 떼어냅니다. 이렇게 하면 라인테잎과 함께 떼어진 부분은 음각이 되고 나머지부분이 양각이 되는데, 이렇게 내 작품의 특징적 기본 베이스인 요철면의 캔버스가 제작되는 것입니다. 이후 수 십 차례의 사포질과 다듬기, 그리고 베이스 칠을 해서 화면베이스를 완성시킵니다. 이렇게 완성된 모델링의 요철 면(modeling made canvas)위에 그림을 그리는 데, 특별한 점은 작품의 이미지가 나무 혹은 숲의 형태를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실재의 사이사이에 존재하는 빈 공간 즉 여백, 혹은 허공을 그린다는 점입니다. 허상을 채워나가면서 실체를 드러나게 하는 회화의 방식은 없음(虛) 혹은 존재함(being)의 공간을 그려냄으로서, 있음(實) 또는 실재함(thing)으로 인식되게 하는 반전, 이를테면 네거티브 페인팅이 되는 것입니다."

 

작가는 이번 5년만의 개인전에서 그간 알려진 작가의 스타일로부터 나아가 새로운 회화실험을 보여준다. 그것은 작가가 그동안 천착해 왔던 숲과 나무의 이미지 위에 물의 번짐이라던가, 붓의 획을 연상케 하는 이미지의 레이어를 하나 더 추가하여 그려내는 것으로, 기존의 투 컬러의 화면으로부터 쓰리 컬러의 화면으로 진화한 것이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풍경에 파적을 가하는 것 같은 이러한 방식은, 그간 힐링의 이미지마냥 여겨졌던 화면에 긴장감을 불어넣어 줌과 동시에, 회화로서의 분위기를 한층 더 풍성하게 해주고 있다.

 

클래식은 느리고 고루하지만 고급스럽고, 팝은 빠르고 신선하나 저급하다는 식의 상투적인 이분법들로부터, 현대미술판을 살아가는 화가가 오직 개인의 화법으로 일어서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미술과 무관한 유명세들이 예술가치로 환원되는 시대에, 순전히 전업작가로서 작품에 매달리는 진짜화가들의 진정성이란 허무한 노력으로 취급될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회화예술에 대하여, 닳고 닳은 화가의 손맛을 기대하고 또한 기억할 것이다. 화구와 안료로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작업실에서, 손과 정신을 서서히 소모해가며 작품과 전쟁을 치루는 화가는 분명 있을 테고, 그 중 한명이 여기에 있다.


- 로터스 / Ph.D_Art study -